천진법과 만진법

어떤 진법을 바탕으로 하여 큰 수에 진법을 따로 두는 건 정말 쓸모가 많다. 먼저 수를 부르는 말을 크게 줄여준다. 그래서 수에 대하여 아주 많은 말을 알아두지 않아도 되게 된다. 또한 큰 수를 다루기 쉬운 적당한 크기들로 나누어 큰 수도 마치 작은 수 다루듯이 할 수 있게 된다. 수를 나타낼 때 알아보기도 쉽다.

이 시대의 사람은 세상 어느 곳에 있든 기본적으로 10진법을 쓴다. 비록 10진법 자체가 그리 좋은 진법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하나의 진법을 쓰기에 우리는 수에 대하여 서로 쉽게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큰 수에 대한 진법은 다를 때가 있다.

큰 수에 대한 진법으로는 대표적으로 1 000진법(천진법)과 1 0000진법(만진법)이 있다. 둘 다 기본적으로 10진법을 바탕으로 하는 일종의 파생 진법, 보조 진법, 확장 진법, 응용 진법이다.

1 0000진법은 말 그대로 1 0000배씩 커질 때마다 단위가 달라진다. 10 000 = 10^4에 따라 10진법의 수를 네 자리씩 끊어 읽어나간다. 동아시아쪽에 주로 있는 이른바 한자 문화권이 곧잘 쓴다. 같은 이치로 하여 1 000진법은 수가 1 000배씩 커질 때마다 단위가 달라지며, 1 000 = 10^3에 따라 10진법의 수를 세 자리씩 끊어 읽는다. 주로 잉글랜드어, 아랍어, 브라질 등에서 쓴다.

개인적으로는 1 000진법을 온 힘을 다하여 세차게 지지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국제적 표준, 특히 과학의 손이 이미 1 000진법의 손을 들어주었다. 과학에서 쓰는 SI 접두사들은 1 000진법이다. 지금 시대는 사실상 유렆계 나라들이 주도하였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국제적 표준 역시 유렆계 나라들이 만들었다. 1 000진법과 그 파생 진법은 유렆계 나라들이 잘 쓰는 진법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따라서 과학을 가까이 하려면 결국 1 000진법을 따라야 한다. 1 000진법으로 써진 수는 단위를 굉장히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 000 m는 1 km(킬로미터)이고 1 000 000 m는 1 Mm(메가미터)이다.

다른 이유로는 디지털 혁명 때문이다.

당연히, 디지털 기술을 더욱 잘 쓰고 잘 받아들이려면 디지털 기술의 절대적 주류가 바탕으로 하는 2진법에 보다 가까운 걸 쓸수록 좋다. 이는 더 말할 것도 없이 1 000진법이다. 바로 2^10 = 1 024인 것이다.

이는 우선 10진법의 약수에 2가 이미 있고, 나머지 약수인 5의 제곱수 중 하나인 5^3 = 125와 2^8 = 128이 우연하게 비슷해서 생긴 일이다. 조금 로맨틱해지자면 1 000과 1 024는 그저 기적으로밖에 안 보인다.

반면 1 0000의 경우 2^13 = 8 192, 2^14 = 1 6384로 하나의 2의 제곱수만으로는 1 0000과 아주 근사한 값을 나타낼 수 없다. 5^4 = 625인데 2^9 = 512, 2^10 = 1 024이다.

디지털 기술을 이끄는 마이크로소프트는 아예 2진 접두사를 완전히 버리고 SI 10진 접두사만 쓸 정도이다. 더욱이 그럼에도 그냥 쓰는 데에 있어 어떤 아주 큰 말썽조차 딱히 없다. (물론 때때로 엄격한 정밀성을 요구할 때는 이 작은 오차 때문에 일이 어려워지기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이 정책을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12진법이 10진법보다 더 좋다는 얘기는 오랜 옛날부터 쭉 있었다. 허나 12^3 = 1 728, 12^4 = 20 736으로 어느 것도 2의 거듭제곱만으로는 나타나기 어렵다. (2^11 = 2 048, 2^14 = 16 384, 2^15 = 32 768)(1 000과 1 024만큼은 아니지만 1 728과 2 048도 약간 가까운 편인데 6^3 = 216, 2^8 = 256으로 대충 비슷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12진법과 그것의 파생, 응용 진법을 썼다면 오히려 디지털 기술을 쓰기 좀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걸 보고 아주 지나치게 로맨틱해지자면, 어쩌면 사람은 2진법의 1 024를 만나기 위해 10진법을 쓰게된 것일 지도 모르겠다.

살아가는 데에 있어 어떤 크기가 1 0000배씩 커지는 것과 1 000배씩 커지는 것 중 어느 게 더 쓸모 있는가도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만약 킬로가 1 000배가 아니라 1 0000배 였다면, 1~9kg는 0.1~0.9 kg이거나 1 000~9 000 g이 되었을 것이고 1~9 t은 100~900 kg이 되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생각해보자면, 1~9 kg과 1~9 t이 곧잘 쓰이는 것은 보면, 적어도 무게에서는 아무래도 1 000배씩 커지는 것이 더 쓸모가 있는 모양이다. 이 또한 1 000진법에 무게를 더 실어주는 것이다.

1 0000진법이 그럼 완전한 날탕이냐 하면 꼭 그런 건 아니다. 1 000진법과 1 0000진법의 비교는 3개씩 끊는 것과 4개씩 끊는 것 중 어느 게 더 좋은가에 대해 얘기하는 것인데, 사실 이는 단순하게 이는 곱셈과 나눗셈에 있어 3과 4를 비교하는 걸로 이어진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4의 셈이 더 쉬운 면이 있다고 본다. 4는 3보다 약수를 하나 더 가지고 있고, 더욱이 그 약수가 온갖 셈에 곧잘 쓰이는 2이다. 따라서 4의 셈을 할 때는 2의 셈을 응용할 수 있지만 3의 셈은 순전하게 3에 기대야만 한다. 만약 사람이 12진법이나 16진법을 썼다면, 나는 아마 ^4인 진법(12->20 736진법, 16->65 536진법)을 밀어줬을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이번에 한해서 10^3이 2^10에 가까이 놓이는 기적이 있었을 뿐이다.

Loading Facebook Comments ...

Leave a Comment

No Trackbac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