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학 노트 - 지도와 경기장

나는 게임의 배경을 일컫는 용어에 맵(지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지금은 게임의 외부에서 게임 내부의  "(특정한) 경기장"을 일컫는 단어로 관용화되었다-아마 90년대 말 국내를 평정한 스타크래프트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게임 플레이가 이루어지는 경기장이 반드시 지도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지도는 경기장의 일반적 의미-선수들의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되는 공간-와 대단히 먼 개념이다. '지도' 용어를 쓰고 있는 게임들이 모방하고 있는 군사적・전투적 관점에서의 '지도'는, 대의를 성취하는 수단으로서의 전투에 주어진 (불공정할 수도 있으며, 그보다는 대부분의 경우에 불공정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전장의 정보이다. 태생적으로 공정경쟁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경기장과는 달리, 지도는 전쟁의 수단이며 전쟁에서 공정경쟁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게임에서 '지도'와 같은 용어를 쓴다면, 그것은 '지도'라는 단어가 일반적인 게임의 특정한 요소들을 가리키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해당 게임이 전쟁행위를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용어는 게임-의존적이다.

게임학적으로, 이러한 용어가 게임-독립적으로 관용화되는 것은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어째서 게임-의존적인 용어가 게임-독립적인 용어로 변모하는 것인가? 많은 게임의 경기장은 주어지는 전장이 아니라 경쟁의 수단으로서 치밀하게 계획된 공간이다. 심지어, 현대 스타크래프트 리그에서 사용되는 '공식맵'들 역시 그렇다. 예컨대 공식맵들이 테란맵, 저그맵 등으로 분류되는 것을 보라. 테란-프로토스-저그 등의 공정경쟁을 위해 경기장이 치밀하게 계획되지 않는다면 어째서 이런 분류가 필요하겠는가?

스타크래프트 이후 나온 많은 게임들에서 '지도'가 경기장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며 관용적으로 정착되는 것은, 게임개발사가 기존 성공작들을 벤치마킹하며 이런 용어들에 대한 반성과 재해석이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이런 사례 하나하나가 지금껏 성공작 벤치마킹에 안주해온 국내 게임개발사들의 처참한 기획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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