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의 친구

 

1.

"류-----리!"

소년의 목소리가 산등성이에 맞아 메아리쳤다.

"류-----리! 어딨니!"

산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건만, 소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리면서 외친다. 지나치게 가쁜 호흡에 그의 코와 입은 타들어간 듯 말라 있었고, 적갈색 머리카락은 땀으로 감겨진 것 같이 축축했다. 그러나 소년은 다시 고개를 들고 벌게진 얼굴에 손을 모아 외쳤다.

"류----------리------!!!"

얼마만큼이나 달려왔을까, 결국 소년은 체력이 다했는지 길 한중간에 멈춰서 버렸다.

"하아, 하아, 하아……."

달리는 중에 느끼지 못했던 현기증이 이제 와서야 소년을 괴롭힌다. 지친 호흡을 정리하기 위해 잠깐 동안만 서 있고 싶었지만, 몇 번이나 쉬어도 가슴은 계속 공기를 요구했다. 무릎에 손을 얹고 한참 동안 숨만 쉬던 그는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대충 닦아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산을 쳐다보았다.

"류리, 어딨는거야……."

 

 

2.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어둑한 연기 너머로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입술을 깨물고 바닥에 둥글게 웅크렸다.

"그녀는 재앙이 될 것이다."

목소리는 단언했다. 여자는 듣지 못한 것처럼 더욱 몸을 움츠렸다. 어디에선가 우지끈 나무 부서지는 소리가 나며 수많은 불똥이 날렸다.

"파멸의 불길이."

여자는 품 속의 아기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아기는 엄마의 심장소리와 함께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목소리는 무기질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이방인이며,"

하늘은 검었다. 검은 연기로 자욱했다. 공기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매캐했다. 여자는 가쁜 호흡을 반복했다.

"그 끝은 자명하다."

그곳은, 대리석으로 지어진 사원이었다. 어디에도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거대한 백색 장승 하나가 웅크린 그녀를 무감각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고한다."

들려오는 말이 환청인지 아닌지, 여자는 구별할 수 없었다. 단지 그녀는 아기를 더 힘껏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사원은 단아하나 화려하지 않았다. 천창으로부터 들어온 빛이 벽면의 섬세한 양각을 타고 흑백의 그림을 그려냈다. 장승은 단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정적 속에 그녀의 소리 없는 오열이 이어졌다.

 

 

3.

차가운 석벽에 푸른 빛이 감돌았다. 손으로 쓸어보자 먼지가 벗겨지며 기이한 문양이 나온다. 어디에선가 청백색 빛이 은은하게 통로를 비췄다.

소녀는 불안해 보였다.

두껍고 낡은 갈색 책 한 권이 그녀의 오른팔에 단단히 안겨 있었다. 바스러질 듯 너덜너덜한 표지를 잡고 있는 손가락은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소녀는 행여 책을 놓칠새라 조금도 힘을 빼지 않고 단단히 쥐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

소녀는 굳은 표정으로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조금 고개를 들어 흩어지는 입김 너머로 통로의 끝을 바라봤다.

밝아지고 있다.

소녀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제단'은 머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조심, 그러나 힘차게 발걸음을 이었다. 불지 않는 바람에 소녀의 금발이 살풋 흩날렸다.

 

 

4.

유난히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소녀는 풀벌레를 유심히 뜯어보고 있었다. 낮게 움츠러든 배나 파르르 떨리는 더듬이, 혹시 뭐가 있나 뒤룩뒤룩 굴리는 눈알까지, 소녀는 계속 쭈그리고 앉아 풀벌레만 쳐다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윽고 소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풀벌레를 집으려고 손을 뻗었다.

"류리?"

"왓!"

소녀는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길지 않은 금발이 물결치듯 흩날렸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손질하고 평상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소년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해?"

"뭐야. 스토. 네가 알 바 아니잖아."

"바보. 지금은 수업시간이잖아."

소녀는 금새 시무룩해졌다.

"그런 수업 지겹단 말야."

그녀는 툭 불만을 던지고는 소년에게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 잠깐만, 류리? 류리!"

소년이 허겁지겁 소녀를 쫓아가자, 남은 풀벌레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른 풀로 펄쩍 뛰어 버렸다.

 

 

5.

"심각한 문제다. 정말로 못 봤나?"

"아, ㄴ…… 네……."

스토는 소매로 식은땀을 훑었다. 평소에도 예사롭지 않은 박력을 뿜어대던 자경단장 단드가 이번엔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특유의 박력을 정면으로 받은 스토는 간이 콩알만해지는 느낌이었다. 스토는 후들거리는 손을 쭈뼛거리며 붙잡고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정말이지?"

"그, 그렇긴 한데……."

"한데?"

단드의 얼굴이 더욱 가까워졌다. 스토는 머리카락과 귀끝이 쭈뼛 일어서는 걸 느꼈다. 그는 떨리는 오금을 펴기 위해 허벅지를 꽉 붙잡고 말을 이었다.

"무……무슨 일이라도 난 건지……"

"흠"

그제서야 단드는 얼굴을 치우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과연 스토에게 사건을 알려줘도 되는지 고민하는 것이리라. 믿음직스럽게 보이던 단드의 큰 칼이 오늘은 유난히 더 크게 보였다.

"없어졌다."

"네?"

스토는 갑작스런 말에 되물었다. 단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덧붙였다.

"'소환의 서'다."

"!"

스토의 얼굴이 놀라움에 물들었다가, 창백해졌다가, 그리고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이미 자경단이 '제단'으로 파견됐지만……."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바로 류리를 구해야 한다. 구하러 가야 하는데…….

"너에겐 따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단드의 서늘한 눈빛이 스토를 사정없이 속박했다. 스토는 침을 꿀꺽 삼켰다. 피할 수 없다면 돌파다. 어른들은 언제나 류리밖에 안 보니까, 이런 시덥잖은 질문이 끝나면 류리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제단'이 어디에 있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류리가 알고 있다면 그도 알고 있는 장소일 것이다. 스토는 머릿속에서 몇 군데 짚이는 곳을 빠르게 정리했다.

"너는, 아마도 류리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아이다. 그렇지?"

어느새 단드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단드의 눈빛이 스토를 아프게 찔러서,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다시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스토는 어금니를 꽉 악물고 심호흡을 한 다음, 단드와 눈을 맞췄다. 그는 딱딱 부딪치는 앞니를 무시하고 더듬거리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로 질문을 요구했다.

"저, 저도 그녀에 관해 잘 알진 못하지만, 제가 말해드릴 수 있는 건 다 말해드릴게요."

"그래. 그러면, "

단드는 스토의 태도 변화를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방금 생각하던 자세로 돌아가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조금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스토는 목이 말라 입술에 침을 발랐다. 이윽고 단드는 질문을 정한건지 다시 스토를 쳐다보고,

"그러면 그녀의 주술이 어느정도 수준인지, 본 적 있나?"

이런 질문을 했다.

 

 

6.

스토는 허겁지겁 나무를 헤치며 달렸다.

"류리!"

따라오라는 듯 나뭇등걸 사이로 어른어른 보이던 그녀의 옷자락이 방금 갑자기 없어진 것이다. 혹시 어디 사냥꾼이 파 놓은 함정에라도 빠진 게 아닐까. 스토는 걱정으로 더욱 발걸음을 재촉했다.

"류----리! 어디있니!"

대강 그녀의 옷자락을 잃어버린 부근에 도착하자, 스토는 손으로 입에 나팔을 만들어 크게 외쳤다.

"시끄러워, 스토."

"엉?"

의외로 대답은 가까이에서 들렸다. 스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래야."

그곳은, 흐드러지게 핀 꽃밭이었다. 우연인지 이 근처만 나무가 없었서, 스토는 꽃잎이 햇살을 따뜻하게 머금는 광경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들꽃 사이에 드러누워 있었다. 금발은 햇살처럼 퍼져 그림자 사이로 반짝이고 있었다. 꽃 향기인지 그녀의 향기인지 알 수 없는 아찔한 무언가가 그의 비강을 찔러서, 그는 우뚝 서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깐 동안의 침묵. 스토는 마치 잘 만들어진 조각을 감상하듯 찬찬히 들꽃 속의 류리를 바라봤다. 어쩌면, 자신의 발자국이 이런 예술 작품을 더럽혀 버릴 수도 있다는, 그런 착각을 했을 수도 있다.

"날 잡으러 온 거 아니었어?"

류리가 먼저 침묵을 깼다. 이런 분위기는 언제나 낼 수 있다는 듯 자신있게, 그리고 장난스럽게. 스토는 내심 아쉬운 한숨을 흘렸다.

"아마도, 맞지만."

스토는 그녀의 옆자리를 찾아 꽃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앉았다.

"조금쯤 안 들어도 괜찮겠지, 수업."

"의외네."

"뭐가?"

어느새 그녀는 일어나 앉아 있었다. 뒤로 손을 짚고, 얼굴은 하늘을 향해, 정면으로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 보다 해야 하는 게 우선이야.' 스토의 좌우명이잖아."

그녀는 목 깊은 곳을 울려, 우스꽝스럽게 스토의 말투를 따라했다. 그는 키득키득 웃었다.

"난 옆의 문제아와는 달리 수업 교재를 통째로 외우고 있으니까. 몇 시간 빠져도 수업내용 정도 문제 없다구."

"너, 말에 뼈가 있어."

류리는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할 말이 없어졌는지 다른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다.

또다시 조용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어디선가 나비가 날아와 들꽃을 두어 번인가 휘젓다 사라졌다. 점심에 가까워오는 햇빛이 미묘하게 따가와지고 있었다.

"……류리."

"응?"

이번엔 스토가 먼저 말을 걸었다.

"수업, 지겨워?"

"물론."

"왜?"

"음……글쎄?"

갑작스런 질문에 류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겨우니까 지겹지?"

"그건 너무 감성적인데."

스토의 짧은 감상에 류리가 다시 볼을 부풀렸다.

"흥! 어제 배웠던 거 오늘 배우고, 오늘 배웠던거 내일 배우잖아."

"수업, 조금씩 앞으로 넘어가잖아?"

"아냐! 그래도, 그런 거 다 똑같다고!"

류리는 이번에야말로 볼을 크게 부풀리면서 소리질렀다. 스토가 여태껏 본 볼 중에 가장 크다. 과연 스토도 여기에는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점이 똑같은데?"

"……."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몇 번씩이나 눈을 굴리면서 계속 고민한다. 그 모습이 오기를 부리는 고양이 같다고 생각해서, 스토는 소리없이 미소를 지었다. 멀리 나무 사이로 토끼 한마리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7.

"활력망, 펴도 되겠습니까?"

던은 부조장 라크에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잊었나? 1차 목표는 '제단'의 수호다. 망은 '제단' 도착 후에 전개해도 늦지 않아."

"알겠습니다."

그들은 말없이 달렸다. 발을 구를 때마다 믿을 수 없을 만큼의 거리를 나아간다. 한참이나 달리던 던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라크를 불렀다.

"참, 라크."

"예."

너무나 빠른 속도에 공기는 거대한 둔기가 되어 그들을 지속적으로 후려친다. 옷자락은 바람에 찢어질 것처럼 심하게 펄럭거리고 있었다.

"조원들 중 달릴 수 없는 조원이 있나?"

라크는 달리면서 조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아슬아슬한 조원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발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땅을 찰 때마다, 그 빛은 순간적으로 강해진다. 마치 신발이 아닌 빛이 그들을 앞으로 튕겨내는 것처럼.

"전투용 활력석은 항시 충전이 원칙인데."

"훈련시 주술이 서툴어 훈련용으로 부족한 경우 전투용을 조금씩 사용해왔습니다."

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중 훈련교범을 바꿔야겠군. 활력이 떨어진 조원은 버리고 간다."

"알겠습니다."

라크는 좀 더 깊숙히 고개를 숙이고는, 조원들에게 조장의 말을 전달하기 위해 조원들 사이사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던은 착잡한 심정을 숨기고 가만히 혼잣말을 바람에 흩었다.

"아마도, 내일이 온다면의 얘기지만……."

 

 

8.

"신님."

토끼가 멀어져 흰 점이 될 때쯤 류리가 갑자기 운을 떼었다.

"응?"

"경서 어딜 쳐다봐도 다 신님 잘났다는 얘기밖에 없어."

"그거 좀 위험한 발상인데."

류리는 피식 웃는 스토를 똑바로 쳐다봤다.

"무슨 얘기를 해도 결국은 '영원하고 거룩하신 세올님 찬미합니다.'뿐이잖아. 이젠 지겹다구 그런거."

"흐음……."

스토는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럼 경서는 똑같다 치고, 똑같은 게 아닌 건 뭔데?"

류리는 손에 일렁이는 불꽃을 담아 스토에게 내밀었다.

"이거. 본 적 있어?"

불꽃을 본 스토의 표정이 점차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9.

류리는 그녀 앞의 거대한 돌문을 보고 있었다. 옅게 푸른빛을 띄는 문 곳곳에 기이한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하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급하게 뛰어다니는 듯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다시 여러 벽에 부딪쳐 돌의 아우성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그녀를 쫓아온 어른들일 것이다. 그들은 따분한 신학 수업을 정말로 좋아하니까.

"……."

이젠 망설일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표지를 넘겨 첫 페이지를 읽어내려갔다.

"그는 돌아오리이라. 인고의 산과 한탄의 강을 넘어, 그는 돌아오리이라……."

 

 

10.

"수아."

"네."

단드는 앞의 겁먹은 듯한 여자아이에게 정색하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혼내는 것이 아니다."

"네……."

물론 소녀의 눈에는 단드의 노력이 무색하게 자꾸 눈물이 어리고 있어서, 단드는 타는 속내를 내비치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수아. 류리를 따돌린 이유가 무엇이냐."

"으……."

애초에 이 아이가 알아줄 리도 없지만, 그녀가 나쁜 짓을 했더라도 혼내는 게 그의 소관은 아니다.

"전혀 혼내지 않을 테니 솔직하게 말해 보거라."

"아……으, 그러니까, 저, 저희들은 그녀가 무, 무서웠어요."

"무서워?"

그녀는 훌쩍이면서도 조금씩 그녀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네. 그, 그러니까, 제가 처음 본 것은 그녀가 던지는 불꽃에 늑대가 잿덩이로……."

"……뭐? 불꽃을 던져?"

"수……숲 한가운데였어요. 호패도 접속이 안 되던 곳인데."

"그런, 그런 말도 안 되는……!"

단드는 경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1.

던은 식은땀을 닦으며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옆에서 라크가 침통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들이 석문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의식은 시작된 후였다. 류리는 제단 위에 떠 무아지경으로 '소환의 서'를 읽고 있었고, 책은 불규칙적으로 빛나며 붉게 응집된 활력을 제단 이곳저곳에 뿌려대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불어온 뜨겁고 습한 바람이 탄 냄새와 함께 그들을 덮쳤다.

"석문 안으로. 전투준비다."

"예."

라크는 대답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고개를 들기 전, 던이 덧붙였다.

"소녀의 참살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 실패한 경우, 마물과의 전투다."

"……예."

"석문 안에 간이 활력망을 준비하라. 그리고 병사들에게, 각오를 받아 둬라. 내가 선두에 서겠다."

던은 굳은 표정으로 명령을 마치고 대원들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12.

"류리!"

스토는 푸른 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를 달리고 있었다.

'늦지 말아야 할 텐데, 늦지 말아야 할 텐데, 늦지 말아야 할 텐데…….'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입으로는 한 단어만 외치면서.

"류----리---!"

쏟아지는 어지럼증과 헛구역질을 참아내며, 그는 계속 통로를 달렸다.

''소환의 서'다.'

단드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이곳은 역사가 쓰이기도 전에 이 땅의 주신 세올이 사악하고도 거대한 마물을 봉인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마을이다. 마을에서 대대로 관리해온 '소환의 서'가 그 증거라고도 한다. 마을 근처 어딘가의 숨겨진 '제단'에 '소환의 서'를 사용하면 이제껏 잠들었던 거대한 마물이 깨어난다고 했다.

'그녀의 주술이 어느정도 수준인지, 본 적 있나?'

단드의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그는 질문을 부정하는 것처럼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라면, 리오의 대사제 수준으로 불의 주술에 능통한 그녀라면, 가능하다. 신전에 있는 간단한 주술책 따위는 며칠만에 떼 버린 그녀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주법에 관한 얘기조차 하지 않았다.

스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너무나 특별해서, 무슨 주제로 말을 걸어야 할 지 알 수도 없었다. 그 또래의 아이들도, 어른들도, 심지어 신관조차 그녀를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변명이야."

스스로 선언한 대로, 변명이다. 그가 얘기를 걸 때마다 류리는 웃으며 대답해 줬다. 스토는 가슴 언저리에서부터 차오르는 후회에 목이 메어 버렸다.

그를 위시해서 모두 바보였다고,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제길."

그녀가 '소환의 서'를 들고 나간 이상, 마을과는 같은 하늘 아래에 있을 수 없다. 마물이 깨어나 마을이 파멸하든지, 아니면 그녀가 죽든지. 그가 달려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건만, 그래도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갔다.

"헉, 헉, 헉……."

그렇게 도착한 곳이 거대한 석문 앞이었다. 옅게 푸른빛을 띄는 문 곳곳에 기이한 문양들이 주황색 활력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단숨에 문 안쪽에서 무시무시한 활력유동이 있음을 눈치챘다.

"류리!"

그는 문을 두들겼다. 그래 봐야 두꺼운 석문에 흡집은 커녕 두들기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지만, 그는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두들겼다. 오른손이 빨개지고, 점점 살갖 이곳저곳이 파이다가,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는 목이 터져라 류리를 외치며 석문을 두들겼다.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석문에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스토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온몸에 금이 간 석문이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굉음을 내며 붕괴했다. 주위가 먼지구름에 휩싸이자 스토는 기침을 하면서 코와 입을 옷으로 막았다.

"콜록, 류, 류리?"

그리고, 그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거대한 포효소리를 듣고 공포에 얼어붙고 말았다.

도마뱀? 아니, 저걸 큰 도마뱀이라고 표현하면 알아들을 사람이 있을까? 사람 손바닥만한 비늘 수 천개가 달린 도마뱀이라고 말하면 될까? 저렇게 등에 가시가 달린 도마뱀이 있던가? 그보다 날개가 달렸다. 그렇지, 도마뱀이 저렇게 홰를 치진 않아. 대체 이건 무슨 생물이지? 아니 생물인가? 혹시 내가 환영주법을 보고 있는 거 아닐까? 그렇지, 이건 환영일 거야. 틀림없어.

"으……으웩, 웩……."

너무나도 현실감 없는 광경에 멀미가 났다. 그는 저녁밥을 완전히 토해내면서 신을 대하는 듯한 원초적인 공포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몸을 떨었다.

"웩, 으……어, 류, 류리?"

모래먼지가 걷히자 마물의 모양이 뚜렷해졌다. 인간이 한없이 작은 존재로 전락하는, 너무나 압도적인 마물. 그 한쪽 손에 정신을 잃은 류리가 쥐인 것을 보고, 스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류리를, 류리를 놔 줘!"

스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용기였다. 아마도 앞에 있는 마물이 현실의 존재라고 쉬이 믿을 수 없었기에, 상상 속에서나 발휘하던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마물이 그의 목소리에 반응해 그를 쳐다본 순간, 그는 심장이 멎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다시 얼어버렸기 때문이다. 마물은 움직이지 않는 그에게 흥미를 잃어버렸는지, 두어번 홰를 치다 류리를 데리고 날아올랐다.

"류, 류리?"

스토는 그제서야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마물이 있던 자리로 달려갔다.

"류리? 류리! 류---------------리----------!"

제단의 천장은 하늘로 뚫려 있었다.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의 한 가운데로, 이미 콩알만큼 작아진 마물의 뒤꽁무니가 보인다. 이제와 목이 터져라 부른다 하더라도, 대답해줄 그녀는 너무나 멀리 가버렸겠지.

"류리……."

스토는 무릎을 꿇었다. 상실은 떠나간 자가 아닌, 남겨진 자의 고독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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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생각했다.

이거 막 날아온 것까진 좋은데, 소환사 녀석이 좀 잘 쉬어야겠는데.

그는 날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양지바른 들판 한 곳에 소녀를 내렸다.

소녀는 그를 풀어준 뒤로 쭈욱 자고 있었다. 활력을 너무나 소모해 버린 때문일 것이다. 용은 내심 혀를 차며 등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친 후 동그랗게 똬리를 틀었다.

평온하게 살고 있던 나를 다짜고짜 봉인해버린 자칭 이 동네 관리자에게 몇 마디 따지러 갈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새로 사귄 이 친구와 먼저 친해지지 않으면.

거기까지 생각한 후 용도 소녀가 깨어날 때까지 느긋하게 낮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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